잔뜩 막힌 도로. 불쑥 충동에 사로잡힌다. 가속기 페달을 끝까지 밟고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상상. 물론 그럴 수는 없다. 페달에 올린 발을 움찔움찔하다가 그냥 경적을 한번 울리는 것으로 '갈음'한다. 걱정이다. 이러다가 조만간 사고 한번 크게 낼 것 같다.
무모한 도전은 젊은이의 특권이라지만, 정말 그럴까? 크게 사고 친 녀석을 돌아보면 죄다 중년이다. 대학 시절에는 범생이처럼 공부만 하던 녀석들이다. 어려운 부모님 일을 도우며 고학하고, 빈털터리 형편에 간신히 결혼해서, 겨우겨우 저축하여 자식을 키워낸 5학년, 6학년 동기들이다. 평생, 직장에서 '스탠다드' 월급쟁이로 살아왔다. 그런데 반백 살이 되어 안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산속으로 들어간 친구, 더듬거리는 영어로 이민가겠다는 녀석, 아내 몰래 만나는 여성이 있다고 슬쩍 자랑하는 동기. 아무리 봐도 그냥 한국의 서울에서 제수씨랑 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건만.
질풍노도의 시기, 중년
정신의학적으로 충동(Impulse)이란 목적 없는 욕동(drive)을 말한다. 이러한 욕동이 의지의 통제를 벗어나 행동으로 옮겨지면 충동 행위다. 정말 가속기를 밟아서 앞차를 들이받았다면 충동 행위가 실현된 것이다. 너무 어렵나? 간단히 말해서 깊은 생각 없이 일어나는 급작스러운 욕동과 행동이다.
예전에는 충동성이 주로 공격성으로 나타났다. 느닷없이 밥상을 뒤엎고, 마누라를 두들겨 패는 이전 세대의 아버지다. 그다지 특별한 이유도 없다. 온 집안은 초긴장이다. 아버지의 표정만 조금 일그러져도 조심조심. 오늘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른다.
그런데 요즘은 이렇게 직접적인 공격성을 보이는 중년은 없다. 충동성의 정의는 사려 깊지 않은 성향이건만, 그래도 조금은 주변 상황을 맞추는 것일까? 흔히 중년의 외도나 갑작스러운 사직, 귀농이나 이민, 은둔 등으로 나타난다.
충동인가? 도전인가?
오해는 말자.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고 준비한 귀농이라면 충동적 행위가 아니다. 평생 꿈이 자영농이었는데, 드디어 그 소망을 실현하는 것이다. 도시의 자산 가격과 농촌의 자산 가격의 갭이 벌어질 대로 벌어진 지금이야말로 귀농의 적기인지도 모른다. 코로나-19로 농산물 가격도 오른다는데…
그런데 적잖은 중년은 이렇게 사려 깊은 오랜 준비 끝에 새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강력한 충동이 마음을 사로잡고, 압도당하는 느낌에 굴복하는 것이다. 그 충동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도무지 스스로 설명할 도리가 없다. 늘 차근차근 따져보기 좋아하던 신중파 박 부장이 아무 준비 없이, 심지어 비자도 없는데 아프리카로 떠나겠다며 사표를 던지는 것이다.
뒤늦은 도전을 칭찬하고, 중년의 새로운 시도라면 손뼉 쳐주는 것이 요즘 문화다. 하지만 손뼉만 치고 끝이다. 오랜 꿈을 향한 도전인지 혹은 한순간의 충동인지는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물어보자. 금세 정답을 알려줄 것이다.
충동의 원인
동물행동학자 콘래드 로렌츠는 행동의 요인에 대해서 이른바 수력충동모델이라는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어려운 이름이 붙었지만, 아주 간단하다.
어린 시절 시골에 있던 작두 펌프를 기억하는지? 무쇠로 만들어진 펌프의 레버를 힘차게 당기다 보면 어느새 지하에 고인 물이 왈칵왈칵 올라온다. 지하수를 충동의 원천이라고 하자. 행동하고 싶은 욕동이 넘실대는 곳이다. 욕동이 클수록 지하수의 수위가 높다. 그리고 레버는 행동 유발을 위한 외부적 요인이다. 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은 결과로서의 행동이다.
물을 퍼내려면 레버를 강하게 당겨야 한다. 우물의 수위가 낮으면 낮을수록 강한 힘이 필요하다. 수위는 업무의 난이도, 레버를 당기는 힘은 월급이라고 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쉬운 일에는 보수가 적은 이유다.
그런데 우물에 물이 가득 차면 레버를 당기지 않아도, 살짝만 레버를 건드려도 물이 콸콸 쏟아진다. 충동적 행동이다. 어느 날 아침 청바지 차림의 부하 직원을 보고 갑자기 사직서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든가, 외부 업체와 미팅을 가는 길에 벽보에서 본 농촌 풍경을 보고는 그대로 차를 돌려 시골로 향했다든가라는 식의 스토리다. 부하직원의 청바지와 농촌 풍경의 벽보는 진짜 이유가 아니다. 너무 오랫동안 우물을 퍼내지 않은 까닭으로 물이 넘치도록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수력충동모델(psychohydraulic model)이다.
우물이 넘치기 전에
뒤늦게 야생의 삶을 택하는 중년은 사실 평생 도시에서 아파트-회사 빌딩만 오간 경우가 많다. 평생 해외여행이라고는 신혼여행밖에 없었다는 중년이 무작정 이민을 결심하거나, 초등학교 무렵 리코더가 마지막 악기였다는 중년 여성이 느닷없이 음대에 가겠다고 직장을 그만두는 식이다. 늦은 나이의 엉뚱한 외도라면? 마음속 성적 판타지를 실현하지 못하고, 너무 올바른(?) 부부관계만 했었는지도 모른다.
우물은 제때 퍼내지 않으면 흘러넘치지만, 너무 오래 내버려 두면 도리어 마른 우물이 되어버린다. 중년의 충동적 행동에는 곧 우물이 완전히 말라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는 것은 아닐까? 노년에 접어들면 아무리 작두질을 열심히 해도 물을 퍼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중년의 무의식에는 '더 늦기 전에 하루라도 일찍'이라는 초조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침 출근길에 갑자기 미국행 티켓을 끊는다든가, 이름도 모르는 이성과 느닷없이 불타는 사랑을 나누는 것은 곤란하다. 분명 후회할 것이다. 한두 번 펌프질로 물을 퍼내고 나면 금세 시들해질 수도 있다. 뒷수습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은근과 끈기의 중년 아닌가? 자신의 충동을 조금씩 발산해보자. 그러라고 있는 주말이다. 이민을 결심하기 전, 답사라도 다녀와 보자. 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단 2주라도 산에서 살아보자. 바람을 피우기 전에 지금의 배우자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해보자. 느닷없이 음대 입시반에 등록하지 말고, 직장인 취미반부터 시작해보자.
한 일 년 정도 짜장면을 먹지 않으면, 정말 짜장면 생각이 많이 날 것이다. 지나가다 무엇에 홀린 듯이 중국집에 들어가 충동적으로 짜장면을 시킬지도 모른다.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오늘부터 평생 짜장면만 먹겠어!'라는 결심이라면 곤란하다. 장담한다. 하루가 지나기 전에 짬뽕에 관심이 가게 될 것이다.
어떤 행동에 관한 강렬한 충동을 느낄 때, 종종 ‘평생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충동의 강렬함은 '과거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지, '미래의 가능성'과는 별 관련이 없다. 우물이 넘치면 일단 좀 퍼내자. 몇 두레박 퍼내고 다시 주변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더 명확해져 있을 것이다.
글 : 박한선 / 정신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삶의지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말 우울증' 떨치고 신나게 보내는 법 4 귤처럼 '활력 충전'시켜주는 음식 5 (0) | 2020.12.12 |
---|---|
하버드에서 75년간 연구한 ‘행복의 비밀’ “돈 말고 사람 남겨야 행복합니다” (4) | 2020.12.11 |
"장수하려면 이런 '성격' 가지세요" '무사태평'이 좋다구요? 천만에! (1) | 2020.12.06 |
내 돈이란? (2) | 2020.12.04 |
4차산업혁명에 맞추어 아나로그 명함이 아닌 디지털 명함을 제작 (0) | 2020.12.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