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집안에 가득한 물건.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서 거실과 베란다, 다용도실에도 가득하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정도는 아니지만, 일 년에 한 번 꺼내보지도 않을 물건이 집안 공간만 가득 차지하고 있다. 비싼 아파트를 사서, 창고로 쓰고 있는 셈이다.
강박적 저장(compulsive hoarding)은 과거에는 정신장애로 취급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 조상들은 뭘 저장할 것이 별로 없었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드니, 소중히 간직할 만한 것은 문갑 하나면 충분히 보관할 수 있었다. 게다가 패물이나 도자기를 제외하면 모두 유기물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의 힘으로 썩어간다. 모든 것은 일시적이었고, 그러므로 더 현재에 충실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저장 강박은 점점 큰 정신적 문제가 되고 있다. 뭐든 안으로 들어와 쌓이기만 하고, 나가는 것이 없으니 심각한 소화불량에 빠진 셈이다. 저장 강박은 전 연령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고령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당장 부모님 댁만 떠올려도 금방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쓰지도 않을 물건을 왜 그리 꽁꽁 보관하시는지. 어려운 시대를 살던 습관이라고 했었지만, 이제 자신도 부모님을 닮아가는 것을 느낀다. 버리지 못하는 중년.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추억이냐 집착이냐
예전에는 강박적 저장을 강박 장애의 하나로 보았다. 수많은 강박 중 특히 물건을 모아두는 것에 소위 '꽂히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그런데 사실 강박장애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강박장애 환자는 강박적 사고나 행동을 부끄럽고 창피하게 여긴다. 힘들기 때문에 제 발로 병원을 찾는다. '몇 번이고 가스불을 확인해야 마음이 편한 내가 너무 싫어요'. 강박장애 환자는 주로 이런 호소를 한다. 저장 강박을 주증상으로 하는 강박장애 환자도 비슷하다. 물건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좀처럼 그럴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강박적 저장은 좀 다르다. 강박적으로 모아두는 것이 아니라,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같은 말 같지만, 아주 다르다. 그래서 최근 미국정신의학회는 별도의 진단명을 고민 중이다. 아직은 연구 단계지만, 분명 일반적인 강박장애와는 다른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중년은 원래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얻기보다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을 유지하는데 주력하는 나이다.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생애사적 변화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집에 있는 책이나 가재도구를 보면 하나하나 추억이 깃들어 있다. 이 옷은 처음으로 해외여행 갈 때 입었던 옷, 저 핸드폰은 생애 처음 장만한 핸드폰, 그 책은 대학교 교정에서 읽었던… 이런 식으로 하면 한도 끝도 없다. 하지만 추억과 연결된 물건을 버리는 것은 마치 과거를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 영 내키지 않는다.
어느 집 서재 한 칸을 가득 채운 사전을 본 일이 있다. 스마트폰이 금세 온 세계의 언어를 찾아주고, 직접 해석해주는 세상이다. 특수 사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종이로 된 영한사전이나 국어사전을 찾을 일은 좀처럼 없다. 그렇다고 소장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5~60년대 사전이라면 골동품이라도 되겠지만, 흔하디흔한 90년대 사전이다. 하지만 버리지 못한다. 여기저기 줄 쳐진 형광펜이 마치 즐거운 학창시절을 증명하는 것 같아 도무지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관계형 저장 강박
저장 강박은 비단 사물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중년은 주식 계좌에서 종목마다 10주씩 꼭 남겨두었는데, 한번 거래한 종목을 다 버리는 것이 야박하다는 것이다. 주식이 마음을 가진 생물도 아닌데, 외로운 자신의 처지를 느닷없이 주식에 투사한 것이다.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친구와 관계를 끊지 못하는 중년도 있다. 고등학교 동창이니 수십 년 지기는 맞지만, 술값 한번, 커피값 한번 제대로 내지 않는 친구다. 그렇다고 만나서 즐거운 것도 아니다. 그저 '나는 오랜 친구를 버리지 않는다'라는 자기만족을 위해서 불필요한 관계를 질질 끄는 것이다.
이러한 저장 강박은 모두 변화를 두려워하고, 버림받을까 불안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더는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것을 끝까지 붙잡고 집착하는 것이다. 혹시 자신도 '유효기간'이 끝나면 버림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반전되어 '유효기간'이 끝난 사물이나 인간관계를 끊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버리지 못하는 중년이 더 인간적이지 않냐고? 냉정하게 잘라내고, 필요 없다고 돌아서고, 다 썼다고 내다 버리면 인정머리 없이 박복한 것이라고? 하지만 저장 강박을 가진 사람은 오히려 정말 소중한 것에는 소홀하기 쉽다. 쌓아두기만 하고 돌아보지 않으니 물건이든 관계든 삐걱거리기만 한다. 버리고, 끊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조금은 아깝고, 조금은 미안하다. 하지만 더 소중한 대상과 가까워지고, 제한된 시간과 공간을 더 귀한 이에게 내어주기 위해서 버리는 것이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지 고민되는가? 그럴 때는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생각해보자. 부인이나 남편 혹은 자녀도 좋다. 아니면 아직 이루지 못한 중년의 꿈도 좋다.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오랜 꿈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장'하고 '쌓아'두자. 그렇지 않다면 눈 딱 감고 버려도 좋다. 버려야만 가질 수 있다.
글 : 박한선 / 정신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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